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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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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목적 공간의 영상관으로 노근리 사건이 갖는 의미와 향후 노근리의 과제를 전달하는... 영상관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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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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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픔이 서린 기억의 조각
    아픔이 서린 기억의 조각

    노근리 사건의 배경 및 상황을 복합매체로 연출하여, 입체적 요소 부여 아픔이 서린 기억의 조각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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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생자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희생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과거와 현재를 연계시켜주는 공간으로서 피난 하는 마을사람들이 철길과 쌍굴에서 미군 ... 희생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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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연출개요

다목적 공간의 영상관으로 노근리 사건이 갖는 의미와 향후 노근리의 과제를 전달하는 홍보영상을 상영

코너구성

  • No im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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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내용

"저 애 우는 소리 때문에 총질을 해대잖아"
그것은 전쟁이었고, 그것은 비극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역사였다.
사람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피난을 떠났다. 첫 포성이 들린 지 6일후, 미군이 참전했다. 미군은 첫 전투에 패배했고 뒤이어 더 많은 미군이 참전했으나, 1950년 7월 20일 대전에서도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미군은 영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근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산골마을 주곡리와 임계리의 여름은 바빴다. 멀리서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했지만, 농사짓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시골 농부들에게는 농사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1950년 7월 23일 미군들이 주곡리 마을로 들어와 소개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산속마을 임계리로 피난을 떠났다.
7월25일 저녁 또다시 미군들이 임계리 마을로 들어와 남쪽으로 피난을 시켜준다고 하였다. 그러자 20여명의 마을 청년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남은 노인, 부녀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설마 자신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야 하겠냐는 마음을 끌고 미군의 강제 인솔 하에 주곡리 마을 앞을 지나, 다시 밤길을 걸어 하가리로 들어갔다. 밤은 깊어갔고 피난민들의 불안과 공포는 어둠보다 더 깊었다. 그렇게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그런데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던 미군들은 남으로 철수하고 없었다. 마치 십년 같은 공포의 밤을 꼬박 지새운 피난민들은 경부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서송원리 부근에 이르자 미군이 피난민 대열을 가로막고 경부선 철로위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피난민들은 지친 몸을 끌고 올라갔다. 그리고 철길을 따라 걸어 노근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미군들은 피난민들의 짐을 수색하였고, 미군들이 어디론가 무전을 보내자 정찰기 한대가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천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전투기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위로 폭격과 기총소사가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26일 그 여름의 뜨거운 햇빛은 붉게 더 붉게 타고 있었다.
살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민들의 발걸음은 노근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1950년 7월 26일 정오 무렵, 미군은 그렇게 사람들을 쌍굴에 가둔 채 총을 쏘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 중 몇몇 건장한 남성들은 어둠을 틈타 가족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탈출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쌍굴에는 많은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미군의 공격에 힘없이 죽어갔다. 믿을 수 없게도 총격은 3박4일 70여 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남아 기억된다. 1950년 7월의 노근리는 이들에게 평생 동안 지울 수 없는 뼈아픈 상처, 한국 현대사의 큰 흉터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의 숨겨진 악몽은 그렇게 그들만의 아픔으로 조용히 묻힐 줄 알았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간 밝혀지기 마련이고 그 진실은 한사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인터뷰 노근리사건이 발생한 후 10년이 지난 1960년 가을, 노근리사건의 피해자 정은용씨는 피해자 몇몇의 서명을 받아 미국정부에게 공식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청서를 제출하며, 노근리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역사의 진실을 지키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인권유린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그 어디에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의 잘못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정은용씨는 노근리사건을 알리기 위해 문학적 방법으로 눈을 돌렸다. 1994년 4월15일 10여년의 준비와 집필 끝에 노근리사건을 내용으로 하는 실화소설을 출간했고, 이를 계기로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의 대변인 정구도씨는 보다 체계적인 진실규명 운동을 위해 학문적인 연구 및 내외신 언론사를 적극 활용하여 사건을 홍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1998년 4월 AP통신 서울지국 최상훈 기자가 취재를 시작했고, 마침내 1999년 9월 30일 AP통신에 의해 노근리사건의 실상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후 전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노근리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기 시작했고, 국내외 여론이 들끓자 한미양국 대통령 지시에 의해 노근리사건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단지 협력의 필요성만 강조될 뿐, 미국 측은 핵심정보를 재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한미양국 정부는 합동조사가 아닌 각각의 진상조사를 1년3개월 동안 진행한 끝에 2001년 1월 각각의 진상조사 보고서와 양국의 공동이해 형식으로 불과 7쪽의 한미공동 발표문을 발표하였다.
사건발생 50년 만에 이로서 미국정부는 한국전쟁당시 노근리 일대에서 미군의 의해 발생한 민간인 살상사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했으며, 그것은 진실의 촛불이 불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윌리암코엔 인터뷰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리사건의 대해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사과가 아닌 유감표명 성명서.
우리는 죽었고, 죽인사람은 없었다.
미군참전용사 인터뷰 노근리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작은 산골마을의 지명이 아닌,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인권 및 평화의 브랜드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의 많은 땀과 눈물이 있었다.
2001년 한미양국의 진상조사가 발표된 이후,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는 미흡했던 노근리사건 진상규명에 대해 정확한 재조사를 촉구하며,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노근리특별법 제정을 위해 국회에 입법 청원서를 제출하고, 2년 가까이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호소하는 등, 헌신적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2004년 2월 9일 국회에서 노근리사건의 희생자 및 유족들의 심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사건 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같은 해 9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영동군에서 희생자와 유족들을 신청 접수 받고,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 위원회에서 심사를 진행하여 226명을 희생자로, 2240명을 유족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2006년부터 시작한 노근이 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착공 5년만인 2011년 10월 완공되었다.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는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로 변경되었고, 2001년도에 창립한 노근리평화연구소와 긴밀히 연계하여 노근리사건 및 인권문제를 더욱 심층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정구도 노근리평화연구소장이 출간한 연구논문집 '한국전쟁기 인권침해 및 역사인식의 문제'가 2009년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 도서로 선정되었고, 노근리사건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리는 등 역사 및 인권관련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는 인권과 평화증진에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외에서 여러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는 노근리평화연구소와 협력하여, 다양한 문화행사도 개최해왔다. 1998년부터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는 제 1회 합동 위령제를 사건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개최한 이래, 매년 이어오고 있다.
또한 2001년 청주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등 도시를 순회하며 노근리사진전을 열었고, 2002년에는 '노근리는 살아있다'를 원조로 하는 연극 '노근리'가 극단 새벽에 의해 청주와 영동에서 공연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3년부터 초, 중, 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권존중과 평화애호사상을 함양하고자 노근리 인권 백일장 및 독후감 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세계대학생 노근리 인권평화캠프를 개최하고 있다. 이는 노근리사건의 핵심가치인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미래에 지도자가 될 세계 각국의 대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평화캠프 인터뷰 2007년부터는 기존의 문화행사 외에 국내외에 저명학자들을 초청하여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 및 평화증진을 위해 기여한 국내외 개인이나 단체를 격려하기 위해 매년 노근리평화상을 수여하였다.
2010년도에는 노근리사건의 아픔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키고,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평화의 메시지를 심기위해 '노근리여 영원하라' 라는 제목의 칸타타를 연주하였다.
반세기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사건의 진실.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그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50년간 노력했던 피해자들을 우리는 가슴속 깊이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전쟁 없는 세상, 밝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노근리사건 현장은 죽음의 땅에서, 생명과 평화의 땅인 노근리평화공원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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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평화공원 > 학예팀
043-744-1943 / 최종수정일 2017-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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